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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설전시실 입구

  • 샌드아트 <잃어버린 사람들>

6.25전쟁 납북자란 ‘6.25전쟁 이전에 남한에 거주하고 있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6.25전쟁 중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북한에게 강제로 납치되어 북한지역에 억류 또는 거주하게 된 사람’을 의미한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선전포고도 없이 38도선을 넘어 기습남침을 감행하여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장악한 북한은 체제 확립에 필요한 지식인 등 인적자원 수탈과 전쟁수행에 필요한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 납북을 실행했다.

  • 납북의 시대적 배경 연표

  • 6·25전쟁 영상

전쟁 발발 직후 북한은 대대적인 남한 주민 연행 및 동원 정책을 계획적으로 추진하였다. 납북자들은 북한군의 삼엄한 감시 하에 포승줄에 묶여 도보로 이동하였으며, 그마저도 폭격을 피하기 위해 밤에만 걸어야 했다. 북한군은 남한 청년들을 강제 징집하여 의용군과 노무자로 동원했다가 북으로 끌고 가기도 했다. 전쟁 중 납북된 민간인의 전체규모는 10만 명 내외로 추산된다.

1.치밀한 납북계획
  • 6·25전쟁의 시작과 납북의 전개

  • 납북 계획 관련 영상

전쟁이 발발하자 납북은 남한에 침투해 있던 좌익세포조직과 좌익단체의 협조로 체계적으로 수행되었다. 북한은 사회주의 정권 수립을 위한 여러 개혁을 진행하면서 각 방면의 인재·인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46년 7월 김일성이 「남조선에서 인테리를 데려올 데 대하여」라는 담화 내용을 발표한다.

2.표적이 된 사람들
  • 납북자 관련 유물

  • 납북자 관련 유물

북한은 사회주의체제 건설에 필요한 인재 확보 및 정권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남한 사회의 저명인사이자, 우익인사, 지식인 계층 2만 4천여 명을 계획적으로 납북하였다. 이외에도 항공사, 운전사, 목사, 농업연구가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도 기획납북의 대상이 되었다.

3.대대적인 납치
  • 감찰관계집』과 『의용군 적년자 명단』 1950년

전쟁이 장기화되자 북한은 남한 점령지 내에서 대대적인 ‘의용군’ 강제징집을 시행하였고 징집된 이들은 대다수는 군복이나 무기도 받지 못한 채 전장으로 내몰렸다. 징집되지 않은 18세~45세의 남녀는 건설공사나 도로와 다리 복구작업 등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4. 반동으로 몰린 사람들
  • 북한의 적대세력 조사

북한은 서울 점령 직후부터 교도관, 경찰, 공무원, 법조인, 우익단체 가입자, 월남자 등을 적대세력으로 분류하고 철저하게 조사·색출·검거하였다. 체포된 이들은 내무서 조사, 정치보위부 심사를 거쳐 주로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되었다.

5. 죽음의 행진
  • 죽음의 행진 3D 애니메이션

북한의 본격적인 북송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에 수행되었다. 구금시설에 갇혀 있던 인사들 이외에 ‘의용군’과 ‘노무대’로 동원된 이들도 이 시기에 후퇴하는 북한군과 함께 북송되었다.

전쟁 중 정부는 북한이 자행한 납북피해를 인지하고 납북자명부를 작성하는 등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휴전회담에서의 협상, 납북피해 가족의 구출대회, 국제적십자를 통한 소식탐지, 유엔에 납북자 송환을 촉구하는 청원문과 ‘100만인 서명 진정서’ 제출 등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다양한 노력을 전개해왔다. 하지만 북한은 현재까지 ‘납북자는 없다’고 주장하며 납북자들의 생사확인마저 거부하고 있다.

1. 끝나지 않은 아픔
  • 『6·25사변 피랍치자 명부』 1952년

6.25전쟁 중 북한이 자행한 납북피해의 규모를 알려주는 것은 전쟁기간부터 각 지역에서 작성된 납북자명부이다. 현재까지 전시 납북자 관련 명부는 총 12종이 발견되었는데, 납북의 전모를 확인할 수 있는 직접자료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2. 좌절된 귀환
  • 『휴전협정에 의한 민간인 교환에 관한 건』 1953년

  • 정전직후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은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해 납북자 귀환을 논의하였고, 1954년 3월 1일부터 하루에 100명씩 실향사민을 남북으로 귀가시키는 데 합의하였다. 그러나 북한에서 남한으로 귀향한 인원은 19명의 외국인뿐, 북한은 남한으로의 귀향을 원하는 남한 민간인이 단 한 명도 없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하였다.

3.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 조철, 『죽음의 세월』, 1963

  • 북한은 납북된 인사 가운데 남한 출신 학생·교수 등을 행사에 동원하고 대남 통일전선공작에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 그들은 이후 강제노동수용소에 수감되어나 감금, 숙청되는 등 비운을 겪게 된다.

4. 채울 수 없는 빈자리

전후 복구 사업과 절대 빈곤의 해결이라는 현실 문제에 부딪혀 납북자 문제의 해결은 점차 국가적·사회적으로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납북 피해 가족들은 가족 해체로 인한 정신적 고통은 물론 가장의 부재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도 겪었다. 일부 가족들은 납북이 월북으로 오인되어 사회적 불명예와 차별까지 감수해야 했다.

5. 귀환을 위한 노력
  • 조선일보사 주최 백만인 서명운동

6. 잊지 않기 위하여
  • 기억의 방

  • 납북자 검색 키오스크

이곳은 납북자분들의 명패를 모셔놓은 기억의 방입니다. 6.25전쟁납북진상규명위원회에서 2011년부터 2015년까지 5년에 거쳐 납북자 신고를 받아서 납북자로 결정된 분들은 4,777명입니다. 그분들의 명패가 가나다순으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납북자 검색 키오스크에서는 납북자 개개인을 찾아보고 그들을 향한 메시지를 남기실 수 있습니다.

휴전 이후 납북자의 귀환을 위한 정부와 민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는 전시납북자 문제는 납북 당사자와 그 가족들에게 현재 진행형의 고통이다. 앞으로 분단을 해소하는 평화통일 과정에서 납북문제가 해결됨으로써 납북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이 잃어버린 인권을 되찾을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는 것은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배려가 될 것이다.

1. 슬픔을 멈추기 위하여
  • 계속되는 납북

정전 협정 이후에도 북한은 어선, 비행기, 베트남 전쟁 등을 통해 국내외에서 남한 국적을 가진 민간인 총 3,835명을 납치했다. 이 중 3,319명은 남한으로 돌아왔으나 아직도 516명의 전후 납북자가 북한에 억류되어 있다.

2. 2000년 이후 납북자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
  • 납북피해 관련 자료

  • 납북피해 가족들은 2000년 11월 ‘6.25사변납북자가족회’를 재결성하여 납북피해 관련 자료를 수집하였고, 이를 토대로 국회에서의 입법화를 위한 청원활동을 전개하였다. 제18대 국회에서 「6.25전쟁 납북피해 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안」이 2010년 3월 공포되었고, 이에 따라 출범한 6.25전쟁 납북진상규명위원회는 납북피해 진상 조사, 국내외 자료 조사, 납북피해자의 증언 채록 등을 추진하여 최종 4,777명을 납북자로 인정하였고, 납북자 통합명부를 작성하였다. 또한 납북자 및 납북자 가족 기념사업을 추진하여 국립6.25전쟁 납북자 기념관 건립, 6.25전쟁 납북피해에 관한 교육·학술 활동 지원, 납북자 위령제 행사 등을 지원하는 등 납북 문제의 진상을 알리고 피해자와 가족의 명예회복을 도모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3. 다시 만날 그 날에
  • 다시 만날 그 날에 3D 애니메이션

  • 납북이라는 사건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우리 민족의 숙제입니다. 7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오랜 시간 동안 스스로 감당해야 했던 이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위로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