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간 삶의 기억
그러하다 인생은 기억, 기억은 잔회(殘灰)
쓸 데도 없는 지나간 꿈은 지금 와서
나의 불서러운 이 몸을 붙잡고
이리도 괴롭히며, 이리도 압하랴.
그러면 나는 이르노니
인생은 꿈, 꿈은 망각의
슬어져 자취없을 그것이라고
가을 지고 겨울 와서 해조차 바뀌는 때의
- 김억(金億, 1896~1950 납북)의 時- 출처 : 조철, 죽음의 세월(성봉각, 1963)
6‧25전쟁 중 문화예술계 인사를 비롯한 정치‧법조인, 경찰 공무원, 전문기술직 종사자, 그리고 평범한 농민, 심지어
학생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들이 북으로 사라졌다. 납북과정에서 사망하였거나, 생존하였더라도 그들의 삶이 현재까지 분명하게
전해지지는 않는다. 남은 가족들은 사랑하는 이를 잃은 울분과 서러운, 한없는 그리움, 월북이라는 오해와 불명예 속에서
고통의 70년을 감내해 왔다. 그들의 얼룩진 상처를 위로하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에서는 납북자
가족들로부터 기증받은 소중한 유물들로 납북자들의 삶을 조명하고자 이번 전시를 준비했다. 전시된 사진 속에는 학창시절의
꿈과 해맑은 소년의 천진스러움, 저마다의 일터에서 쌓아온 열정, 앳된 부부의 설렘, 어린 자녀에 대한 지극한 사랑,
부모에 대한 한없는 존경 등, 인생의 매순간을 차지했던 행복의 모습들이 담겨져 있다.
광복 후 좌‧우 이념대립과 새로운 국가건설을 향한 대혼란의 시기 속에서도 저마다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갔던
그들. 평범하였으나 특별했고, 치열하였으나 여유로웠을 그 시절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결국 잊혀져간 삶이 되고
말았다.
1950년 6월 무더웠던 여름이 가고, 서늘한 가을은 지고, 매서운 겨울이 와서 해조차 바뀌어가도, 결코
잊히지 말아야할 ‘못 다한 시절’을 그들이 거쳐 갔을 이곳 임진강 기슭에서 조심스레 펼쳐본다.
대한제국말기와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우리는 누군가는 집안의 희망인 아들로 누군가는 대를 이어야 하는 귀한 자손으로 누군가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집안을 이끌어야할 가장으로 세상에 존재했다.
태어나고 자란 환경은 모두 달랐지만 부모와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마냥 행복하기만을 바랬다.
소년시절 우리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찍부터 생업에 종사하거나, 형편이 되어 학교를 다니며 각자의 꿈을 이야기하며 미래를
향해 달려 나갔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어 누군가는 토목공사나 송탄유채집에 강제 동원되기도 했으며 학도병 지원을
강요받기도 하였다.
그 암울했던 식민지 조국에서 황국의 신민이 아닌 독립된 나라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은 하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기쁨과 새나라 건설의 희망 속에서
누군가는 여론을 대변하는 정치인으로
시국(時局)에 관한 보도를 담당하는 언론인으로
대대로 가업인 토지를 일구는 농업인으로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학자로
마음을 달래주는 문화예술인으로
학생들에게 지식과 생활태도를 가르치는 교사로
다치고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로
전문지식을 가진 기술자로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노력했을 것이다.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도 남녀 간의 사랑은 꽃피고 우리는 결혼을 했다. 사진 한 장으로 혼담이 오가기도 하고 일터에서 만난
여인에게 청혼하기도 했다.
마을 회관에서, 또는 예배당에서, 혹은 집 앞마당에서 아름답게 성장(盛粧)한 그녀 앞에서 평생을 함께하자는
약속을 했다.
결혼 후 지방 근무로 떨어져 살거나 생계에 어려움이 있을 때도 내 아내에 대한 사랑만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
전쟁이 발발한 뒤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우리는 표적이 되었다.
이 나라에 한 치 잘못한 일이 없으니 아무 일 없을 거라는 굳은 신념도, 지인과 함께 뒷방 벽장 속에서
숨죽이며 무사하기를 바라던 희망도, 허위로 자술서를 써서라도 가족에게 돌아갈 수만 있길 기도했던 그 간절함도, 설마 아픈
이 몸을 끌고 가겠냐는 인간적인 믿음도
무자비한 이념의 굴레 속에서 한 순간의 연기처럼 사라졌다.
“내 아들아, 딸아, 그리고 여보 나 금방 다시 돌아올게“
“9월 20일 밤 수감자들은 끌려나와 열 명씩 결박을 당한 후 북한군의 삼엄한 감시 하에 긴 죽음의 행렬을 지었다. 서울
종로, 창경원 앞, 혜화동을 지나 돈암동을 거쳐 미아리로 해서 10월 초순까지 십여 일 동안 도보로 끌려갔다. 이
과정에서 오래 갇혀 있었던 몸이라 보행이 어려웠고 체포될 때 입었던 남루한 여름 옷 바람에 맨발로 끌려가다 혹시 쓰러지는
사람이 있으면 채찍과 총대로 사정없이 맞아야 했다. 맞은 사람은 고꾸라졌다가 매에 못 이겨 벌떡 일어나는 죽음의 납북
길이었다.”
- 납북자 채대식의 탈출 증언 『나는 이렇게 살았다』 , 을유문화사, 1988 -
아버님은 형세가 이미 기운 것을 아셨기 때문에 식사하시다 말고 피할 겨를도 없이 ‘내가 죄 지은 게 없으니 얘기하면 바로
나올 거다’고 말씀하고 나가신 게……. 그게 끝이야.
- 김기정(납북자 김재조의 아들) 증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