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아침 7시, 국방부 정훈국은 서울중앙방송국을 접수하고 아침방송을 중단시켰다. 곧이어
라디오방송으로 북한의 남침 사실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별다른 동요나 대대적인 피난 행렬은 없었으며 서울운동장에서는
야구경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인사가 이미 대전으로 피난을 떠났음에도 서울을 사수하자는 방송이 라디오로 퍼져 나왔고,
이에 안심한 시민들 100만 여명은 28일 한강다리 폭파 이후 북한군에 점령된 채, 납북되거나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6·25전쟁은 무력 충돌 뿐 아니라 체제 선전이 중요시된 국제전이었다. 따라서 전쟁기 각종 매체는 이념을
선전하는 제3의 부대가 되기도 했다. 70년 전 발행된 신문·잡지·도서, 그리고 수많은 선전물에서 ‘사실’이 어떻게
전달되었는지, 적군을 아군으로 만들기 위해 어떠한 ‘설득’이 이루어졌는지, ‘냉전의 무기’가 되었던 이 시대 미디어를
통해 6·25전쟁을 다시금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6월 25일 아침, 국내 주요 신문사 기자들은 북한의 침략을 알리는 호외를 발행했다. 이튿날 이들 신문사는 국방부의 남침
발표 담화문을 머리기사로 보도했으나, 28일 서울이 북한군에 점령되면서 9월 서울이 다시 수복될 때까지 신문 발행을
중단해야 했다. 이 시기에 수많은 남한 언론인들이 납북 혹은 피살되었고, 인쇄시설과 자재가 파괴되었다. 서울거리에는 북한
조선로동당의 기관지가 창간되어 남한 주민들에게 배포되었다.
대구와 부산 피난지에서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전시판戰時版 신문이 발행되었다. 전쟁기 국내 신문의 보도는 주로 국방부와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내용을
싣거나 외신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반해 해외 각국 언론은 수백 명의 특파원을 한국에
파견하여 열띤 보도 경쟁에 돌입했다.
6·25전쟁 보도 사진과 기사들은 해외 주요 시사잡지에
게재되어 전쟁의 과정이 생생하게 전달되었으며, 종군 기자나 포로를 비롯한 참전 군인들의 회고록이 발간되어 6·25전쟁에
대한 다각적인 시선을 확인해볼 수 있다.
총과 칼이 아닌 펜과 카메라로 무장하고, 총알과 포탄이 빗발치는 전투 현장을 누비는 또 하나의 병사, ‘종군기자’. 6.25전쟁에서도 그들은 존재했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9시 30분 서울 주재 특파원 잭 제임스 기자의 전쟁 발발 뉴스 최초 보도를 시작으로,
6.25전쟁의 첫 기사, 그리고 정전협정까지 3년간 남북한의 전쟁 소식을 알리기 위해 국내외 종군기자들은 위험천만한 전투 현장의 일분일초를 전장의 군인들과 함께 했다..
냉전 체제가 가속화되면서 미국은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한 ‘심리전’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등장시켰고, 한국전쟁에서 선전의 효과를 적극 활용하는 정책을 펼쳤다. 1947년부터 미국의 극동지역 사령부 정보참모부에는 심리전과(PWB, Psychological Warfare Branch)를 두어 본국의 정책을 기본으로 선전매체를 생산하도록 하는 하위조직을 두었다. 6·25전쟁 발발 후 대한민국 국방부 정훈국은 미 심리전과의 검열 속에 다양한 선전물을 생산하였다.
1950년 6월 25일부터 정전 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여 간의 전쟁은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낳았다. 참전한 군인 250여만 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실종되고, 남한 지역 사망자 24만 4천여 명, 북한 지역 사망자가
28만 2천명에 달했으며, 피난민은 1953년에 2백 60여 만 명이었다.
전쟁은 사람들의 가슴에 어두운 그림자를 남겼다. 그리고 6·25전쟁, 그 시련의 시간을 잊지 않기 위하여
사람들은 펜을 들었다. 누군가는 전쟁의 매 순간을 일기에 담거나, 지워지지 않는 죄책감과 이별의 슬픔을 수필로, 끝없는
그리움을 시에 담기도 했다.
치열한 전투의 승리와 패배, 포로 생활의 경험, 전장의 참상과 고난 등을 회고한 개인의 기록들은 전쟁기
미디어가 다 담아내지 못한 현장의 진실한 목소리다.
펜과 카메라를 들고 뛰어든
이들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위대한 열정이 있었기에
전선에서도 피난지에서도
모두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종이 위에 펼쳐진 그 전쟁의 기록들은
70년 분단의 땅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기억이다.
전쟁의 기억
폐허와 상처를 걷어내고
절망과 아픔이 희망으로
다름을 인정하는 이해로
서로가 마음으로 통하는
그 중심에 ‘미디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