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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잃은 어지러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학교에 가야한다고 했습니다. 할아버지 동네와 옆 동네, 그 옆 동네의 이름이 차례차례 일본어로 바뀌었고, 이웃집은 일본어를 몰라 토지조사 때 대대로 농사짓던 땅을 빼앗겼습니다. 하다못해 버스를 타기 위해 차표를 살 때도 일본어로 말해야 했습니다. 장남이었던 할아버지는 배워야만 집안을 일으키고, 황국의 신민이 아닌 독립된 나라의 주인으로 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 1. 김문찬의 공로훈장, 1993, 김인상 기증
  • 2. 이인범의 가족, 일제강점기, 이장국 기증
  • 3. 계윤찬의 가족, 1940, 계은찬 기증
  • 4. 김병태의 졸업증서, 1931, 김기환 기증
1부 펼치다1

단단한 체격에 운동을 좋아하셨던 할아버지는 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이하였습니다. 온 나라가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들썩거렸고, 또 조금은 혼란스러웠습니다. 그해 쌀농사는 모처럼만에 풍년이었고 일본으로 보내는 강제 공출도 없어졌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굶주렸습니다. 독립은 되었지만 한반도에는 남과 북을 가르는 38°선이 생겼습니다. 할아버지는 갑자기 생긴 38°선 때문에 고향으로 가지도 못하고 집으로부터 학비와 소식이 끊겨 신문팔이를 하는 학생을 돕기 위해 앞장서서 나섰습니다. 마을의 청년들은 다정하고 쾌활한 성격의 할아버지를 의지하며 따랐고, 할아버지의 집은 늘 사람들로 북적거렸습니다. 조금이라도 배우고 뜻이 있는 청년들은 함께 모여 정치적 신념에 따라 다양한 단체를 만들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청춘을 바쳤습니다.

  • 1. 이종령의 검사시절, 일제강점기, 이성의 기증
  • 2. 고종섭과 제자들, 1940, 고학구 기증
  • 3. 변명원의 조선상업은행 명함, 1950년경, 변유식 기증
  • 4. 김각선의 졸업증서, 1948, 김인선 기증
2부 전시장 전경 사진1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유난히 하늘이 높고 꽃 바람이 흩날리던 날, 개나리가 탐스럽게 피어있던 너른 앞마당에서 결혼했습니다. 아빠가 태어나던 날 양쪽 귀가 짝짝이었던 아빠를 안고 “짝귀가 재주가 많다던데 내가 천재를 낳았다”며 기뻐하셨던 할아버지. 더운 여름날, 펄펄 끓는 열 때문에 잠들지 못하는 삼촌을 업고 “아픈 건 나 주고 너는 빨리 나아라.”하며 밤새 마당을 거닐었던 할아버지. 쉬는 날이면 아침 일찍 아빠를 시켜 쉬고 싶어 하는 할머니를 졸라 강가로 소풍을 나가 물수제비를 뜨며 소년처럼 즐거워했던 할아버지. 다정하고 상냥했던 나의 할아버지. 어수선한 세상이었지만 가족이 함께한 시간들은 반짝거렸고 따뜻했습니다. 남부러울 것이 없는 날들이었습니다.

  • 1. 이용주의 결혼기념, 1940, 이정임 기증
  • 2. 권해용의 결혼기념, 1941, 권영일 기증
  • 3. 윤삼식의 디즈, 일제강점기, 윤병조 기증
  • 4. 이동식의 시집, 일제강점기, 이구동 기증
납북된 문화·예술인들 이미지

할머니의 일기장

그릇이 귀했던 시절, 친척 집에서 준 바가지들을 내게 가져다주려고 좋아라 들고 오던 당신. 유난히 울음이 많고 자주 보채던 둘째를 힘든 기색 한번 없이 안고 달래주던 다정한 당신. 당신이 그렇게 끌려간 날, 나는 저녁밥을 지어놓고 밤새 당신을 기다렸지요. 영영 헤어짐을 알았더라면 저고리라도 하나 들려 보낼 걸...멀쩡한 신이라도 신겨 보낼걸... 춥고 험한 길을 헤매고 있을 당신 생각에 매일 밤 가슴을 치며, 어린 것들을 데리고 휘청거리며 살아왔습니다. 이제 나는 우리가 행복했던 그 시절, 꽃 같은 새색시가 아닌 주름진 할머니의 모습이지만 더 늦기 전에 당신을 꼭 한번만 만나고 싶습니다.

  • 1. 박성우의 아내, 일제강점기, 박두화 기증
  • 2. 이승직의 아내와 아이들, 1940년대, 이만규 기증
  • 3. 김병태의 이발기, 미상, 김기환 기증
  • 4. 이종령의 금강산 관광기념 쟁반, 미상, 이성의 기증